죽음의 부정: 프로이트의 인간 이해를 넘어서

어네스트 베커

발제자: 조소현, 이지석
날짜: 2024년 3월 24일


Opening Question: 나의 전이 대상이 무엇일까?

그 대상이 가려주는 공포가 무엇일까?
그 전이 대상이 최적의 대상인가?
더 넓게는 나의 causa-sui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사랑, 술, 학업적 성취, 쇼핑, 신앙 등)

1장) 머리말: 인간 본성과 영웅적인 것

인간의 본성에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자기 확장의 특권이 있는데, 이는 우주적 의미, 자기 존재의 중요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개인은 자신이 영웅적임을 느껴야 고귀한 측면의 영웅성을 발휘할 수 있다.

1부: 영웅주의의 심층심리

2장) 죽음의 공포

영웅은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서 되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안에 죽음의 공포가 잠복해 있지만, 저마다 방식으로 억압하며 살아간다.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갖고 있는데 이것이 자기 보전의 원동력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계속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고 있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

3장) 정신분석학 기초 개념의 재정립

인간의 정수(essence) 즉, 인간의 고유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인간은 동물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동물적이면서 상징적인 게 공존하는 역설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조건을 부정하려 애쓰고, 자신을 상징으로만 보고 동물이 아닌 것처럼 애쓰는 것을 “항문적”이라고 부른다. (예시: 배설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한 항문 마개)

어린 아이일 때부터 부모와 상호작용하며 경험하는 공포가 오이디푸스 프로젝트(독립), 거세 콤플렉스와 성기 선망(절단에 대한 공포, 몸의 유한함)으로 나타나고, 성행위(육체적 자아)를 통해 해소한다. 아동기에 거세콤플렉스를 겪으며 아동은 몸과 자아 간의 갈등을 알게 된다.

실존적 역설; 유한성 속 개별성(individuality within finitude)은 ‘난 대단해~ 후훗’ vs ‘난 우주의 먼지같은 존재야..힝’을 뜻한다.
카우사 수이(causa-sui): 스스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

4장) 필수적 거짓으로서의 인간 성격

만일 영웅성의 기본적 본질이 꾸밈 없는 용기라면 왜 그렇게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한 것일까?

자신이 권위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Why? 매슬로에 따르면 삶의 강렬함에 대한 회피와 두려움(요나 증후군) 때문이다. 피조물로서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느끼는 것은 본능이다.
죽음의 공포의 반대편에는 인간 자신의 신 같은 위대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최대의 잠재성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피하려고 하는 양가적 감정이 있다. 완전히 살아있는 것만큼 - 경험하고 개성을 만드는 것만큼 - 죽음과 소멸의 불안을 깨닫게 하는 게 죽음말고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높은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완벽한 순간에 우리가 힐끗 엿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요나 신드롬)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성장으로부터의 도피, 낮은 목표설정, 자신이 할 수 있는 것ㅇ르 행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발적인 무능력화, 거짓된 우둔함, 그리고 거짓의 겸손 등등은 실제로 웅장함에 대한 방어이다.
매슬로우

"우리들은 바로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성에야 말로 양가적 감정이 있어 매료됨과 동시에 두려움이 있고, 의욕을 불태움과 동시에 방어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벌레이자 동시에 신이라는 기본적인 인간이 갖는 곤경의 한 단면이다." 다시 말해서 항문을 가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Q. 지금 나의 삶은 내가 살아낼 수 있는 최선의 삶인가? 개선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창조적 해결책, 요나 신드롬 관련)

인간 =>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동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에 있고, 망각을 통해 생활양식을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격은 절망에 대한 신경증적 방어 수단이다. 현실 is 고통이기 때문에 고통을, 즉 현실을 회피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동 is made by 환경(부모 역할 중요함)이라는 의견이 있다.
But 브라운은 아동은 자신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5장) 정신분석가 키르케고르(Kierkegaard)

인간=영+육
영; 자의식, 불안 인식 가능케 함. 동물과의 차이. → 키르케고어는 인간의 성격(character)이 불안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로 이해했다.

비본래적 인간=직접성의 인간= 속물 근성을 가진 생각 없이 걍 흘러가는 대로 사는 인간 (Inauthentic)
인간이 평범한 삶을 살려는 이유는 무한한 가능성의 자유가 위험하기 때문에, 가능성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에 있음을 주목한다. 반대로 지나친 제한성(유한성, 필요성)은 인간에게 모든 것이 필연적이고 시시하게 경험되게 한다.

그럼 이 불안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떨쳐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새로운 모험으로 나아가며 성장을 위한 도약의 원동력으로서 불안을 이용할 수는 있다. 인간 너머를 추구해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의미이다.

6장) 프로이트의 성격 문제를 재조명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적 행동으로서의 피조물성 강조한다; 성이론. 억압된 성욕
억압된 죽음에 대한 인식/두려움이 아닌 억압된 성욕을 강조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카우사 수이 기획의 포기, 즉 굴복을 하지 못했다.
에로스 성적 욕구에 대한 집착 버리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2부: 영웅주의의 실패

7장) 인격이 부리는 주술 - 부자유의 핵심

우리는 왜 권력자를 따르는가?
전이 때문이다. (권력자와 같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이 권력을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나의 행동의 결과를 탓할 대상이 생긴다.)
권력자도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투사할 수 있어 공생적 관계이다.

전이란?
→ 우리의 문제를 투사하기 위한 통제적 방법이다. 공포 길들이는 수단이자 양심 즉, 선하고자는 충동을 충족시키고자 사용한다.
인간은 외부로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투사하여 살아간다.
전이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1) 힘을 느끼게 해주는 대상의 이상화, 실제보다 높여보는 전이 (2)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을 더 부정적으로 인식

아가페(Agape)

  • 나보다 큰 무언가에 나를 내려놓고 합쳐지고 싶은 동기
  •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동기 (단순한 불안에서 나온 게 아니라)
  • 굴복, 희생, 기꺼이 종속시킨다

에로스(Eros)

  • 나의 능력과 개별성을 발달시켜서 눈에 띄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신나는 경험을 하고자 하는 동기
  • 나의 재능을 어떻게 실현하고, 자기 확장을 통해 세상에 기여할 수 있을까?

랑크: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가페적 사랑 확장의 완성이자 진정으로 창조적인 유형의 성취를 나타낸다.
실존적 역설(ontological paradox): “만일 아가페에 굴복하면 자신을 발전시켜서 남은 생애를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가 에로스를 너무 많이 확장시킬 경우 자신을 자연적인 의존과 더 큰 창조를 위한 의무로부터 단절시킬 수 있다.”

8장) 오토 랑크- 키르케고르 정신분석의 완결

낭만적 해법; 우주적 영웅주의 충동을 사랑의 대상에게 고착시킨다. 연인을 신격화하여 정신적으로 굴복한다. 연인에게서 구원을 원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In the long run, such symbiotic relationship becomes demoralizing to both parties, for it is just as unbearable to be God as it is to remain an utter slave. )

‘죽음은 섹스의 쌍둥이 형제다.’
-> 섹스는 육체적 죽음에 의한 부정(생식하는 동물은 죽음)과 고유한 개인적 재능의 부정이다.
아이가 성적 질문을 할 때 생물학적 지식이 아니라 삶의 궁극적 신비에 대해 설명 해주어야 한다.
인간은 종교의 가장 높은 너머를 지향해야 한다. 신에게 복종하고 자연에 굴복하는 것이 죽음을 정복하는 것이다.

연애팁!

연인을 나의 신으로 만들면 어떤 재앙이 펼쳐지는가?

  1. 연인이 신이 되는만큼 쉽게 악마로 바뀔 수 있다. 연인에게 의존하는만큼 묶이게 되는데, 서로 힘이 되는 방향이 아니라 서로 학대하는 방향으로 이용하고 이용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연인이 나의 신이 되면, 연인의 아무리 작은 단점도 나에게 매우 큰 위협이 된다. “그녀가 작아진다” = “내가 죽는다” → 짜증, 공허, 무가치감
  3. 완벽한 구원을 연인에게서 얻기를 바라지만 연인도 구원을 원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은 우리를 내려놓고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정할 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4. 신이 되는 부담감에 괴로워하는 동시에 초라하고 무가치한 노예(상대)를 향한 실망과 분노(resentment)를 갖게 된다.
  5. 이런 불완전한 관계에 실망하여 완전히 쾌락적이고 육체적이기만 한 섹스를 추구하는 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섹스는 열등감과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영웅주의의 문제’에 대한 장기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ex) 플레이보이, 쾌락주의자

[창조적인 해결책]

9장) 정신분석의 현재 성과

신경증은 보편적이다. 모든 인간은 억압(부분화, 절편화)을 통해 현실을 살아간다. 세상과 자신 사이에서 통합과 분리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이상적이다.
신경증 환자는 내면에 매여 스스로를 소진한다. 창조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생산적이지 않다는 점이 예술가와의 차이점이다.
객관적 창조성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카우사 수이 프로젝트: 자신이 타인과 문화의 힘으로 보호받기에 끄떡없고 자연에서 중요하며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체하는 것.’
인간은 환각을 갖고 살아간다. (외적 환각: 예술, 종교, 철학, 과학, 사랑/ 내적 환각: 자신과 타인의 힘에 의존할 수 있다는 믿음) 삶은 환각으로서만 가능하다.

종교(기독교)
-> 신에 대한 확신을 갖고 기댐으로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을 확장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전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자연에 굴복하여 피조물임을 고백, 영웅적 인격으로서 자신을 확장)
피조물성을 통해 희망을 얻는다.

정신분석에서 ‘신경증’이라고 부르는 것과 종교에서 ‘죄’라고 부르는 게 사실 같은 대상이다. 신경증;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도.
죄; 자신을 신과 같은 존재로 높이는 것, 자신을 우상화하여 자신의 나약함과 의존성을 부정
→ 카우사 수이 프로젝트에 진실로 만족한 것처럼 가장하고 그것을 본성에 강요하려는 시도 (편협한 대상에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창조의 기적과 전체 의미를 자신에게 제한시키며, 거기서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 스스로에게 사기친다.)
비현실적일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착각들로부터 받을 수 있던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죄인(혹은 신경증 환자)은 자신이 부인하려고 애쓴 자신의 피조물성, 비참함, 가치 없음, 죄책감 등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경험하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이다”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양극단을 번갈아가게 된다.
관측 가능한 증거와 연역적 논리로 삶의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현대 문화는 “믿음”을 갖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고, 그 결과 위와 같은 신경증이 발생하게 되는 문화적 요인이 되었다.
→ 삶의 문제는 어떤 수준의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가에 있다. (착각이 없을 수는 없다.)

Q. 인간이 살아가기에 “가장 좋은” 착각의 수준 혹은 전이의 대상은 무엇인가?

10장) 정신질환의 원인

  1. 우울증: 영웅성을 간직/발휘하지 못할 때 무력감과 의존성, 죄책감 느낀다. 죄책감을 이용하여 타인을 통제하고 자신을 높인다.
  2. 조현병(=정신분열증): 자신과 타인을 불신하는 자기애적 신경증.
    인간 경험이 상징적 자아와 신체적 자아로 나뉘는데 이것이 통합되지 않으면 조현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과 달리 자신감 있게 자신의 경험을 통제하지 못하며, 자신의 개인적 의미에 창조적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에고가 없다.
  3. 도착증: 개별성이 신체에 짓눌리지 않도록 하려는 저항
    자아와 몸을 분리한다. 억압과 몸/에고에서 안정감 느끼지 못하여 통제와 안전을 특정한 대상을 통해 느끼고자 하는 것이다.
  4. 피학증(masochism)/가학증(sadisim): 본인이 고통을 당하거나 타인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고통을 통제한다고 느낀다.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통제하고자 한다.

(아들러) 모든 정신질환의 기저에는 용기의 문제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독립적인 삶에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정신질환자는 삶과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지 못하고(무능력) 두려워하여(공포) 문화적 영웅주의를 발휘하지 못한다.

From this point of view the problem of mental illness is one of not knowing what kind of heroics one is practising or not being able—once one does know—to broaden one’s heroics from their crippling narrowness. Paradoxical as it may sound, mental illness is thus a matter of weakness and stupidity. It reflects ignorance about how one is going about satisfying his twin ontological motives. The desire to affirm oneself and to yield oneself are, after all, very neutral: we can choose any path for them, any object, any level of heroics. The suffering and the evil that stems from these motives are not a consequence of the nature of the motives themselves, but of our stupidity about satisfying them.

3부; 회고와 결론; 영웅주의의 딜레마

11장) 정신분석과 종교: 영웅적 개인이란 무엇인가?

‘정신요법은 자신을 긍정하고, 자존감을 옥죄는 우상을 무너뜨리고, 신경증적 죄책감의 짐을 덜도록 해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성격에 메여 있으며 이를 초월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다. 인간 조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Rieff) 인간은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억압은 세계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고, 억압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진실한 인간 존재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한계가 있어야 한다. 세계를 부분화할 수 없는 개인의 all or nothing 신경증 환자의 의식 (과대망상증 혹은 무가치한 죄인 사이의 교착 상태) → 한계를 짓고 부분화할 필요가 있다.

(Tillich)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는 용기”를 지니고, 자기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실재 세계의 영원불멸의 모순을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용기를 지닌 담대한 목표는 비존재를 최대한 자기 존재로 흡수하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의 이 같은 내재성의 존재론에서 우리가 묘사하는 것은 어떤 기적적 방식으로 탈바꿈하고 세상을 탈바꿈시키는 피조물이 아니라 세상의 더 많은 부분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새로운 형태의 용기와 끈기를 발달시키는 피조물이다.

인간은 자기 몸의 너머를 지향해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종교적 신에게 투사해야 치유받을 수 있다.

Q. 신의 힘으로만 죄책감과 피조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주적 영웅성을 추구하지 않는 현대인은 술과 마약으로 망각 상태에서 살거나 쇼핑하거나 과학이나 심리학에 의지하며 살게 된다.